"역사 너머 인간을 들여다본다 – 아디다야 짐브르트슈타인의 《밤의 여행자들》 리뷰"
“그 어둠을 지나면, 진짜 내가 보였다”
처음 《밤의 여행자들》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무언가 몽환적이고도 철학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이 단순히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아닌 '기억의 강을 건너는 고통스러운 순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이스라엘 작가 예디다야 짐브르트슈타인이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구술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특한 형식의 산문집이다. 단순히 '그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신적 시간여행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어둠은 기억보다 먼저 온다
《밤의 여행자들》에서 등장하는 ‘밤’은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지우는 힘이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듯한 상태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백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밤은, 단순히 물리적인 어둠이 아니라 존재가 무너지는 상태를 은유한다.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죽여야 했고,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아침을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 어떤 이는 “몸은 깨어 있었지만, 영혼은 이미 죽었다”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겪는 우울, 불안, 외로움 또한 저마다의 '밤'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빛은 오지만, 그 전에 겪는 어둠의 밀도는 다르다. 나는 나만의 어둠을 지나온 적이 있다. 그 밤이 길어지면, 사람은 기억조차 지워지길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 속의 ‘밤의 여행자들’은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으로 살아남았다.
그건 무너지지 않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었고, 지금 우리가 읽는 이 책은 그들의 밤에서 건져낸 ‘존재의 조각’들이다. 우리는 종종 역사나 고통을 숫자로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밤의 여행자들》은 말한다. 진짜 어둠은, 기억보다 먼저 찾아오고, 그 어둠을 견딘 자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이 책은 묘하게도 말수가 적다. 감정을 쏟아내는 법도 없고, 설명조차 절제돼 있다. 그런데 그 침묵이 너무나 또렷하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통증, 표현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아픔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생존자들은 울부짖지 않는다. 그저, 말한다. 담담하게, 아주 천천히. 그 침묵과 간결함이 오히려 모든 장면을 선명하게 만든다.
나는 한 생존자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읽고 멈칫했다. “처음엔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까봐, 그래서 결국 말했어요.” 이 말은 내 마음을 꽉 잡아당겼다. 살아남은 자는 늘 ‘왜 나만 살아남았을까’라는 죄책감을 짊어지지만, 그들이 증언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침묵은 비로소 이야기가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가 내 귓가에서 조용히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그건 소음이 아닌 ‘속삭임’이었고, 외침이 아닌 ‘기록’이었다. 그 섬세한 방식이 오히려 내 감정을 더 크게 건드렸다. 우리는 종종 큰 소리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보여준다. 진짜 고통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더 뚜렷하게 들린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묘한 책임감이었다. 나는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말았다. 그들이 무엇을 겪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그 순간부터 나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감상문은 그래서 하나의 약속이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 기억을 전하겠다는 작은 다짐.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역사란, 뉴스에서나 보는 거대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밤의 여행자들》을 통해 나는 알게 됐다. 역사란 한 사람의 개인적인 고통, 아주 사적인 감정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하루를 어떻게 버텼는지,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종이조각을 어디에 숨겼는지, 그렇게 아주 작은 기록들이다.
그런데 그런 조각들이 하나 둘 이어지면,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된다. 나는 그 조각들을 읽었고,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다. 잊지 않기 위해, 가끔 다시 읽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잊지 않았어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방식의 연대라고 믿는다.
마무리: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사람에게
누구에게 이 책을 권할까 고민했을 때, 바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밤이면 자주 울고, 삶에 대한 방향을 잃은 듯한 친구였다. 이 책은 그런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위로란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랬어"라고 손 내밀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밤'을 통과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길고 깊어서, 다시는 새벽이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누군가는 그 밤을 견뎠고, 그 이야기를 남겼고, 지금 내가 그것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감히 말한다. 이 책은 삶이 흔들릴 때, 마음의 중심을 다시 잡아주는 작은 등불과 같다.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멈추고 싶을 때, 그냥 조용히 이 책을 펼쳐보라고. 아무 말 없이 누군가의 밤을 함께 걷다 보면, 이상하게도 나의 밤도 조금은 덜 외로워질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책이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에게 이 책을 건네며 말하길 바란다.
“이 책이 나를 지켜줬어. 너에게도 그런 책이 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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