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불사》
- 삶을 꿈꾸던 이들이 만든, 죽음보다 더 차가운 세계 -
줄거리 요약
《불사》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1920~30년대에 걸쳐 구상한 작품으로, 이상주의가 지배하던 혁명 직후의 러시아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 역사적 진보에 대한 회의, 그리고 죽음과 불멸의 이중성을 탐구한다.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 아래 당국에 의해 ‘출판 부적합’ 판정을 받으며 오랫동안 공개되지 못했고, 작가 사후에야 그 진가가 밝혀진 숨겨진 명작이다.
주인공은 ‘불사(不死)’라는 관념 자체를 탐구하는 기술자 니키타 피르카노프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함께, 죽음 없는 삶, 즉 **“기술을 통해 달성하는 불사의 시대”**를 꿈꾼다. 정부는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를 중앙아시아의 한 도시로 파견한다. 그 도시는 실험적 공산주의 모델로 운영되며, 죽음을 극복하는 과학 기술과 정치 이념이 융합된 공간으로 설계된다.
하지만 피르카노프가 도착한 그곳은 이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간성은 메말라 있고, 감정은 억압되며, 죽음을 부정하려다 오히려 삶 자체를 죽이고 있는 역설적 세계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통도 느끼지 않지만, 기쁨도 없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통제된 사회 속에서, ‘불사’는 영원한 삶이 아닌 생의 소외와 반복, 정지된 고통의 다른 이름이 되어 있다.
피르카노프는 점차 이 이상향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과학과 정치가 인간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죽음을 배제한 삶이 오히려 더 깊은 죽음을 낳을 수 있다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이 도시에 사랑을 남기고 떠나지만, 그 사랑조차 체제 속에서는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결국 그는 떠나는 길목에서 깨닫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비로소 삶이 시작된다.”
《불사》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념이 어떻게 인간성을 소멸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이고 시적인 저항의 서사다.
인물 심리와 사회 구조의 해부
주인공 피르카노프는 혁명 이념에 충실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깊은 내면적 질문을 품고 있는 지식인이다. 그는 과학 기술로 죽음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이상주의자’지만, 현실의 불완전함을 감지하고 괴로워하는 근대적 딜레마의 화신이다.
그가 실험 도시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냉혹하다. 죽음이 사라졌다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살아있다는 감각조차도 사라져간다. 그의 심리에는 점차 혼란, 불안, 공허감이 자라나며, 그는 결국 생명보다 체제가 앞서는 세계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플라토노프는 이 작품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구조를 극도로 사실적으로, 동시에 우화적으로 묘사한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감정은 위협이 되며, 사랑조차 집단주의 윤리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다. 개인은 이름 없는 존재로 치환되고, ‘죽지 않는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러한 구조는 20세기 전체주의 체제의 핵심을 정확히 반영한다. 인간의 욕망을 제거하고, 이성만으로 세계를 설계하려는 시도는 결국 ‘살아 있는 시체’들의 사회를 만든다는 메시지다.
플라토노프의 문체는 건조하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절망과 냉소, 그러나 동시에 깊은 연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그는 비판자가 아니라 관찰자이며, 체제를 넘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실생활 적용 : 이상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 감각’ 회복하기
《불사》는 먼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기술 진보, 정치 이념, 자본 권력 등에 의해 삶의 방향을 규정당하고 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불멸의 사회’를 향한 또 다른 추동력이다.
하지만 플라토노프는 말한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삶도 인정하지 않는다.”
첫 번째 전략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감각’ 회복하기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을 명확하게 만드는 요소다. 유한성은 오히려 삶에 몰입하게 해준다. 우리는 끝이 있기에 더 진심을 다하고, 더 애틋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걸 부정할 때, 삶은 반복되고 의미를 잃는다.
두 번째는 ‘비인간적인 효율성’에 경계하기다. 요즘 사회는 감정보다 성과를, 존재보다 생산을 강조한다. 하지만 진짜 삶은 비효율 속에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쓸모 없는 대화, 계획 없는 하루—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만든다. 불사의 꿈은 생산성과 통제력의 산물일 뿐, 따뜻한 관계와 사랑은 효율을 넘어설 때 비로소 살아난다.
세 번째는 시스템 바깥의 언어를 회복하는 일이다. 플라토노프는 체제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인물들을 보여주지만, 독자는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침묵, 연민, 소소한 웃음’처럼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감정 언어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뉴스와 알고리즘, 업무 언어로 가득 찬 하루 속에서, 인간적인 언어—진심어린 말, 감정 표현, 슬픔을 인정하는 말투—를 의도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마무리
《불사》는 단지 ‘죽음 없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삶 없는 사회에 대한 경고다. 인간이 더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본질임을 플라토노프는 집요하게 묻는다.
그의 인물들은 냉소적이지 않지만,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그저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된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내 삶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설계 속에 있는가?”
“죽음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삶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가?”
플라토노프는 결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깊고 조용한 울림으로 우리 내면을 두드릴 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짜로 살 수 있다는 이 냉정한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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