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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숨겨진 명작 리뷰 | 《욕실》 – 장 필립 투생

by 50분전 발행됨 2025. 4. 15.

 

숨겨진 명작 리뷰 ❘ 《욕실》 – 장 필립 투생

장 필립 투생의 《욕실》


“나는 욕실에 머물기로 했다.” … 그리고 삶이 흐르기 시작했다.



줄거리 요약

《욕실》은 벨기에 출신 작가 장 필립 투생의 데뷔작으로, 1985년 발표 당시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실존주의적 소설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름도, 뚜렷한 직업도 없는 한 남자다. 그는 파리의 한 아파트 욕실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긴다.

그가 욕실에 머물기로 한 이유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세상의 분주함, 시간의 압박,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피로감 속에서 ‘완전한 무위(無爲)’를 실천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욕실은 그에게 피난처이자 고요한 세계이며, 외부로부터 단절된 시간의 캡슐이다.

그의 여자친구 에디트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처음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욕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은 남자의 내면만큼이나 외부 세계와 충돌하게 된다. 어느 날,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베네치아로 떠나지만, 그 여행조차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풍경 속에서도 그는 무기력하고, 감정 표현 없이 모든 것을 흘려보낸다.

결국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욕실로 복귀한다. 어느새 욕실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그의 정체성과 존재를 반영하는 은유적 장소가 되어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현대인이 느끼는 무의미함, 정체성의 혼란, 사회와의 단절을 고요하지만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야기에는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독자는 오히려 깊은 울림을 느낀다. 《욕실》은 무위(無爲) 속에 숨은 삶의 본질을 묻는 아주 낯설고도 시적인 작품이다.

 

인물 심리와 사회 구조의 해부

《욕실》의 주인공은 매우 이례적인 존재다.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 욕실이라는 공간을 선택한다. 이는 물리적 회피이기도 하지만, 존재론적 저항이기도 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행동하라”, “진보하라”, “결정하라”는 요구를 던지는데, 그는 그 모든 요청을 거부한다. 그리고 “욕실에 머물기”라는 비생산적 선택을 통해 삶의 무의미함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의 심리는 철저히 무감정적이고 중성적이다. 그는 특별히 우울해 보이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에디트와의 관계에서도 별다른 열정이나 충동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현대인이 겪는 ‘감정의 평탄화’, 즉 외부 자극에 무뎌진 채 감정을 억제하고, 무기력 속에 방치되는 심리상태를 상징한다.

주인공의 이 같은 태도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현대사회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준다. 직업, 정체성, 소비, 관계, 성취 등에서 ‘결정하고 실행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그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한 것이다.
에디트는 그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외부 세계에 여전히 발을 딛고 있으며, 주인공의 욕실 세계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다. 결국 이들은 물리적으로 가까우나, 정신적으로는 서로의 우주를 건널 수 없는 존재들이 된다.

사회 구조적으로 보면, 이 소설은 “공간의 선택이 곧 삶의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욕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공간이자, 자기만의 시간이 보장되는 장소다. 주인공이 이곳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사회적 생산성이나 관계 중심적 구조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나아가, ‘행동하지 않는 것이 곧 반행동’이 되는 시대의 아이러니를 포착한 문학적 장치다.

 

실생활 적용 전략: 현대인의 탈출 욕망과 무위의 선택

《욕실》은 단순한 기이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핵심은 현대인의 깊은 피로와 탈출 욕망이다. 이 소설을 현실에 적용해보자면, 우리는 일상에서 ‘욕실 같은 공간’을 찾고, 의도적인 무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 전략은 심리적 ‘욕실 공간’ 만들기다. 이는 단순히 실제 욕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과 역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템포’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루 중 10분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어떤 정보도 받아들이지 않는 ‘비정보 시간’을 마련해보자. 그것은 사고와 감정이 회복되는 시간으로 전환된다.

두 번째는 무기력에 죄책감 갖지 않기다. 우리는 쉬면 게으르다고 느끼고, 생각만 하면 쓸모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란다. 주인공처럼 욕실에 머물지는 않더라도, 목적 없는 산책, 노트에 끄적이기, 창밖 보기 같은 무위의 행위를 삶 속에 용인해보자. 그것이 바로 생산 중심의 사회에 대한 감정적 저항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는 삶의 속도를 재조정하는 루틴 만들기다. 주인공은 욕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멈춘다. 물론 우리 삶에서 모든 걸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 혹은 하루 중 일부라도 ‘나의 속도’로 호흡할 수 있는 루틴을 만드는 것은, 번아웃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리지만, 이 소설은 말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가까이 삶을 느낄 수 있다”고.

마무리

《욕실》은 이야기로 보기엔 너무 단순하고,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과감한 선택을 다룬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당신은 너무 바쁘고, 너무 연결되어 있으며, 너무 자신을 잊고 있다’고.
장 필립 투생은 주인공을 욕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독자에게 삶을 다시 바라보는 가장 열린 시선을 제공한다.

그는 탈출하지 않는다. 혁명도 일으키지 않고, 세상에 분노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모든 것에 저항한다. 이것은 격렬한 정치적 구호보다 더 강한 침묵의 문장이다.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너무 많은 걸 하느라 진짜로 살고 있지 않은 건 아닌가?”
“잠시 욕실에 머물러도 괜찮지 않을까?”

《욕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장 의미 있는 선택’으로 바꿔놓는 문학적 실험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독자에게 가장 필요한 문장일지 모른다.